5·18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투쟁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는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총성과 함성이 뒤섞인 열흘간의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가장 숭고한 장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뜨거웠던 5월의 기록을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역사적 배경: 12·12 군사반란과 정치적 혼란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독재 체제를 유지해온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1980년 봄,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었고,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했습니다.
5월 18일: 항쟁의 시작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계엄군이 전남대학교를 봉쇄하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당겨졌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교문 앞에서 평화롭게 시위하던 학생들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 시민의 증언: "그날 오후, 금남로는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처음에는 학생들만의 시위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평범한 시민들, 노동자들, 심지어 아주머니들까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계엄 철폐',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어요."
5월 19일~20일: 시민들의 저항과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계엄군은 최루탄과 진압봉을 넘어 총검과 실탄까지 사용하며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은 오히려 더 많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습니다. 택시기사, 버스기사들이 차량 시위에 동참했고, 노동자, 상인, 주부 등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합류했습니다.
5월 20일,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처음으로 발포했습니다. 이날 오후 금남로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계엄군의 총탄이 빗발쳤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5월 21일: 시민들의 무장과 도청 탈환
계엄군의 무자비한 발포에 맞서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했고, 이날 오후 치열한 전투 끝에 광주 도청을 장악했습니다.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고, 광주 시내는 시민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시민군 참가자의 기억: "우리는 단지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총을 들었지만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었어요.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5월 22일~26일: 해방 광주와 민주시민공동체의 탄생
계엄군이 철수한 광주는 '해방 광주'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했고,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도시를 관리했습니다.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를 돌보고, 헌혈하는 모습은 위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연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도청 앞 광장에서는 매일 밤 횃불집회가 열렸고,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회복과 계엄 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와 단절된 채, 언론은 광주의 상황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왜곡 보도했습니다.
한 시민의 증언: "당시 광주는 마치 작은 민주공화국 같았어요. 아무도 가게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고, 서로를 돕고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잠시나마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경험했습니다."
5월 27일: 비극적 종말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도청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들은 결사항전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너졌습니다. 이날 새벽, 광주 도청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과 마지막 방송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도청 마지막 방송: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최후의 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는 우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부디 살아남아 오늘의 진실을 전해주십시오."
희생과 진실의 은폐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공식 집계로도 사망자 165명, 부상자 약 3,000명, 행방불명자 수십 명에 이릅니다. 진압 이후 신군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광주사태'를 북한과 연계된 폭동으로 왜곡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체포되어 고문과 재판을 받았습니다.
민주화의 불씨가 된 5·18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진압 당시에는 실패한 항쟁처럼 보였으나,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민주화의 과정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것은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1995년에는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등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았고, 2002년에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아시아의 민주화 운동에 영감을 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여정: 5·18 정신의 계승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가치입니다.
진실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의 과정은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발포 명령자와 책임자 문제,
헬기 사격 의혹,
암매장지 발굴 등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이 남아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우리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5·18의 정신은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
'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라는
가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년 5월이 오면,
우리는 광주의 그 뜨거웠던 열흘을 기억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갈 것을 다짐합니다.
"부활한 광주여 영원히 타올라라, 민주의 불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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